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38년 알렉산드리아 폭동 (문단 편집) == 배경 == [[마케도니아 왕국]]의 군주 [[알렉산드로스 3세]]가 [[아케메네스 왕조]]를 잇따라 격파하고 이집트를 정복한 이래, 그가 세운 신도시 [[알렉산드리아]]는 지중해 동부에서 가장 번영한 도시로 손꼽혔다. 이 도시의 거주민들은 그리스에서 알렉산드로스 3세의 뒤를 이어 이집트에 군림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홍보에 따라 그리스에서 이주한 이들이 주류를 이루었지만, 수많은 이방인들도 이곳으로 이주해서 새로운 삶을 살고자 했는데, 그 중엔 이집트에서 인접한 시리아에 거주하던 [[유대인]]들이 많았다. 그들은 특유의 끈끈한 공동체 의식과 탁월한 상업 역량을 발휘해 알렉산드리아에 기반을 확고히 다졌다. 알렉산드리아가 건설된 지 300여년이 지난 서기 1세기 무렵, 10만 이상의 유대인이 알렉산드리아에 살았다. 그들은 도시의 5개 구역 중 2개 구역에 주로 살았지만, 다른 세 개 구역에도 상당수의 유대인이 살았다. 알렉산드리아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은 도시의 원주인인 그리스인들과 상당한 수준의 교류를 했다. 두 민족간의 통혼은 흔했으며, 유대인 상류 가문들은 [[헬레니즘]]을 앞다퉈 수용하고 자녀들에게 그리스식 교육을 수행했다. 그리스 학자들도 유대교의 엄격하면서도 체계적인 교리에 호감을 표했으며, 적지 않은 그리스인이 유대교로 개종하기도 했다. 이러한 문화의 교류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인물로 '유대인 플라톤'이라는 별칭으로 불릴 정도로 그리스 철학에 통달했지만 율법 준수와 유대인의 관습을 지키는 것 역시 중시했던 [[알렉산드리아의 필로]]를 들 수 있다. 그러나 두 이질적인 민족이 한 도시에서 오랫동안 함께 살면서 언제나 화목하게 지낼 수는 없었다. 많은 그리스인들은 [[그리스 신화]]를 배격하고 자신들이 믿는 신만이 진정한 신이라는 유대인들의 배타적 신앙을 고깝게 여겼다. 유대교 원리주의자들 역시 헬레니즘에 빠져들면서 유대교 신앙심이 약해진다고 여기고 반헬레니즘 운동을 전개했다. 또한 도시 빈민들 사이에서 떼돈을 벌어들여 도시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일부 유대인들에 대한 반감이 갈수록 커졌고, 상류층 역시 유대인들이 도시의 주도권을 가로채려 들까 걱정했다. 이 때문에 알렉산드리아에서는 두 민족간의 충돌이 간혹 벌어졌고,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역대 파라오들은 갈등을 조정하는 데 심혈을 기울여야 했다. 기원전 30년 프톨라마이오스 왕조의 마지막 파라오 [[클레오파트라 7세]]가 자살하고 [[옥타비아누스]]가 이집트를 정복했다. 알렉산드리아의 그리스인들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시절에는 국가의 지배민족으로서 상당한 특권을 누릴 수 있었지만, 이집트가 '아이깁투스 황제령'으로 전락한 뒤에는 동방의 일개 도시민 취급을 받게 되고 지금까지 누렸던 특권을 상당수 박탈당하고 속주세를 납부해야 했다. 물론 옥타비아누스는 이들이 로마의 지배에 순응하도록 다른 민족에 비해 낮은 세율을 내도록 했지만, 그들은 특권을 잃고 일개 속주민으로 전락한 사실 자체만으로도 상대적 박탈감에 빠졌다. 그런 와중에 여러 유대인이 로마 시민권을 획득하면서 사회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하자, 그들의 불만은 더욱 커졌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시절에는 오직 자신들만이 정치에 관여할 수 있었는데, 이제는 한 수 아래라고 여겼던 유대인과 동등한 취급을 받고 더 나아가 로마 시민권을 획득해 자신들보다 나은 대우를 받기도 하니 위협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이에 유대인을 비방하는 움직임이 알렉산드리아 내 그리스 학자들 사이에서 유행처럼 퍼졌다. 아피온은 <유대인 반박문>에서 기원전 3세기 이집트의 그리스인 학자 [[마네토]]의 '이집트 역사'를 인용하면서, 과거 이집트에 거주하던 유대인들이 [[나병]] 환자들이었기 때문에 추방되었다고 주장했다. 이는 [[출애굽기]]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드러낸 것이었다. [[알렉산드리아 대도서관]]의 사서이자 스토아 철학자 카이레몬도 아피온과 비슷한 견해를 밝혔다. 이시스 여신이 꿈 속에서 당시 파라오 아메노피스에게 나타나 전쟁 중에 자신의 신전이 파괴된 것에 대해 꾸짖었고, 거룩한 서기관 프리토바우테스가 파라오가 이집트에서 오염된 사람들을 쫓아낸다면 더 이상 경고를 받지 않게 될 것이라고 권했다고 서술했다. 이에 파라오는 25만 명의 병자를 모아서 추방시켰는데, 그들의 지도자 중에는 [[모세]]와 [[요셉]]이 있었다고 한다. 이에 격분한 유대인 역사가 플라비우스 요세푸스는 <아피온 반박문>에서 한 때 유대인들이 이집트인을 통치했으며 나병 때문에 쫓겨난 건 터무니 없는 소리라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야곱-요셉을 기점으로 시작된 이스라엘 민족의 이집트 체류와 모세의 출애굽이 [[힉소스]]의 이집트 침공 및 추방 사건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전제 하에 힉소스의 어원을 포로와 연관시켰다. 그러면서 마네토의 글을 인용해 힉소스가 포로 생활을 하다가 나중에 이집트를 정복했지만, 테베의 이집트 왕들과의 전쟁에서 패한 뒤 이집트에서 쫓겨난 뒤 광야를 지나 시리아에 들어가서 모두를 수용할 수 있는 도시 예루살렘을 건설했다고 덧붙였다. 이렇듯 양측간의 비방전이 오가면서, 알렉산드리아에서는 불온한 기류가 흘렀다. 그러던 38년 초여름에 [[헤로데 아그리파스 1세]]가 알렉산드리아를 방문한 직후에 심각한 폭동이 일어났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